말랑말랑
2016. 5. 26. 15:19나답게 살 용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무지의 지

 멀리서 보면 다 아는 것 같았는데, 가까이서 보면 몰랐던 게 많을 때가 있고,

 가까이서 볼 때 다 아는 것 같았는데, 멀리서 보면 또 몰랐던 게 많을 때가 있다.

 잘 안다고 생각한 그 일도 관점을 바꿔보면 다른 일이고 새로운 사실이 나타난다. 알지만 아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다 알수는 없다.

 농사일이 그렇고 역사가 그렇다.

 먹을 것이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라 농작물은 그냥 쉽게 자라는 줄 알았다. 회사 근처에 노지가 있어 토마토, 고추, 옥수수 등을 가져다 심었는데, 다른 밭의 것들은 잘 자라는데, 우리가 심은건 시름시름하다. 그냥 흙이 있고, 해가 있고, 물이 있으면 무조건 잘 자라는 줄 알았는데, 아마 지금 그들은 변해버린 환경에 아주 열심히 적응 중 일 것이다. 쉬워보인다고 먼저 우습게 볼일은 아닌 거 같다.

 

 

나를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에 대해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질 것이고, 더구나 아는데 그치지 않고 바꾸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준다는 그 사람은 정말 좋은거다. 있는 그대로의 나도 내가 싫은데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줘~~ - 이것 참 기가차는 말이다. 니가 머라고 하든지 난 여기서 한발자국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얘기지. 그래. 그래야 한다치자. 그럼 너는? 있는 그대로의 너를 너는 사랑하니?

 

직장을 잃거나 돈이 없다고 실망하는 사람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닌 것을 선택한 셈입니다. 직장, 돈, 외모, 건강은 세월의 흐름이나 의도치 않은 불행으로 잃어버릴 수 있지만 영혼과 자기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을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이 부끄럽지 않느냐" - 소크라테스

 

"음미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 나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나의 진실을 탐구하고, 나의 영혼을 끊임없이 보살펴야 한다.

 

나-뇌-신체(세계)

인간의 어떤 행동은 자기에게 도움(선)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단순히 신체적인 이유나 환경적인 이유로 선택하지 않는다.

(내가 착하길 바라는게 아니고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거겠지. 나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말하는 건 내가 예의가 없다면 다른 사람에게 욕을 듣기 때문이 아니라 니가 욕을 할꺼니라 그러는 거겠지.)

너의 생각을 말해라. 다른 사람이 이러네. 세상이 이러네라고 말하면서 마치 그것이 당연한 기준이고 내가 생각한 것은 틀린 것처럼 꾸며 말하지말고, 그냥 너한테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너의 이야기에 끌어들이는 것 뿐이다.

 

자신이 선택했다는 것은 분명 자의지가 들어가 있는 행위이다. 만약 여러가지 원인들과 이유로 인해 그렇게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건 자신이 선택한게 아니고, 어차피 그렇게 선택되었을 일이다.

 

아이는 일주일이 지나면 그만큼 영리해지지만 어른은 제자리걸음이다. 아이는 새로운 것을 배우며 자신을 바꿔나가지만, 어른은 똑같은 주간지를 뒤적거릴 뿐이다. 지금 아이와 어른의 세포 하나하나를 만든 음식이 절대 같을 리가 없듯이 아이와 어른의 뇌세포 하나하나를 만든 세계도 절대 같을 리가 없다.

 

 끊임없이 지를 탐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내 곁에 세계에 대해 계속 탐구하고 이해한다면 나는 항상 어린 아이와 같이 살수 있을 것이다.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과거의 사건으 들고 나올 경우, 그 사건을 트라우마라 여기고 현재 문제의 책임을 다른 무엇 또는 누구에게 전가하려는 것이다.

 

 유유상종 - 비슷한 것들끼리 모인다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모이면 비슷해진다는 말은 맞는 것 같다.

 

말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말에 따르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이다. 가만히 있으면 다른 사람과의 마찰이나 알력을 피할 수 있을 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이해받지 못하고 길게는 대인관계를 해치는 결과를 불러온다. 이것이 말하지 않는 데 따르는 책임이기도 하다.

 

 말을 꺼내어 주위에 파문을 일으킬지도 모르지만, 마찰이 두렵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늘어놓는 것은 착각입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반항기는 누구나 겪는 것이 아니다. 반항하게 만드는 부모와 반항하는 아이가 있을 뿐이다. 자녀가 반항할 만한 행동을 부모가 하지 않으면 자녀는 반항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히려 부모가 반항할 만한 행동을 하는데도 부모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반발하지 않는 자녀가 문제다. 부모의 말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일 경우 문제가 생긴다는 말이다.

 

 칭찬과 야단은 상대와의 관계에 있어 상하관계가 전제가 된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할 지라도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사람 사이에 상하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이야기 해야 한다. 대등한 관계라면 잘못을 저질러도 야단치는 대신 말로 설명할 것이다.

 

 "엄마 싫어"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라고 할 때 이는 사실상 명령이 된다. 다시 말해 부모가 '나를 좋아하라'고 아이에게 명령하는 셈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인생을 살지 않는다면 누가 자신을 위해 살아주겠는가?'

 

 

분노가 등을 떠밀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분노라는 감정을 이용한 셈이다. 그러나 화내는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화를 냄으로써 사이가 더 멀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자기 생각대로 움직일 수는 없다.

 

 무용은 춤추는 행위에 의미가 있을 뿐, 춤을 추어서 어딘가에 도달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춤을 춘 결과로 어딘가에 도달하겠지만 어딘가 가기 위해 춤을 추는 사람은 없다. 어딘가 도착해야 하는 것이라면 무용은 비효율적인 것이다. 여행 역시 이러한 움직임이다. 목적지가 여행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집을 떠난 순간순간이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새가 나는데 공기가 저항이 되지만 공기가 없다면 새는 날 수 없다. 새가 하여야 하는 일은 공기의 흐름을 읽고 그에 맞추어 나는 것이다.

 

 사후 논리(과거에 일어난 일을 나중에 설명하는 것)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없는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국가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때 대의명분을 걸지만, 이는 표면적인 것일 뿐 애초에 전쟁을 하려는 목표는 따로 있다. 어떻게든 전쟁을 정당화하려고 사후에(즉, 전쟁을 하려고 결정한 후)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처럼 사후에 설명하는 심리학은 현실을 추인할 뿐이기 때문에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  따라서,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현실을 초월할 필요가 있다. 현실은 있는 그대로 옳은 것이 아니며, 그대로 받아여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강한 빛을 지금의 자신에게 비추고 내일이 보이지 않는, 내일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삶을 선택하라. 그러면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마음껏 살고 '지금 바로 이곳'에서 행복을 발견하다보면 그 순간들이 이어져 인생이 된다. 인생을 수직선처럼 보는 것이 인생을 바라보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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