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보드를 타다 두 번 넘어졌다. 두 번 모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니 다친 곳도 같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첫 번째 부상은 단순했다. 대둔근, 즉 엉덩이 근육만 다쳤다. 아프고, 불편했지만 범위는 명확했다.
하지만 두 번째 부상은 달랐다.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허벅지가 당기고, 종아리가 뭉쳤다.
처음엔 이상했다. 왜 같은 충격이 전혀 다른 곳을 망가뜨렸을까.
답은 간단했다.
첫 번째 부상에서 대둔근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 두 번째 충격이 왔다.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약해진 대둔근을 감싸기 위해, 허벅지와 종아리가 나서서 그 역할을 대신하려 했다. 그러다 그 근육들이 한계를 넘어 무너진 것이다.
충격은 하나였다. 하지만 그 충격을 받아내는 구조가 이미 흔들려 있었고, 그 결과는 엉뚱한 곳에서 나타났다.
우리는 왜 싸웠을까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의 싸움도 늘 그런 식이었다.
누군가와 식사 준비 때문에 다퉜다.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그랬다.
'왜 당신만 편하게 있어?', '내가 매번 해야 해?' 같은 말들이 오갔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원인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식사 준비는 마지막 충격이었다.
오래 전부터 작은 것들이 쌓여 있었다.
무시당한다는 느낌, 인정받지 못한다는 감각, 피로가 쌓이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외로움.
그 감정들은 다 '대둔근'이었다. 진짜 다친 곳이었다.
그런데 그것들은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다.
그래서 다음 충격이 왔을 때 —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오늘 저녁 메뉴'였더라도 — 주변의 모든 것이 나서서 감당하려 했다.
오래된 서운함이, 말하지 못한 외로움이, 묵혀 둔 피로감이 일시에 튀어나왔다. 싸움은 번졌다.
식사에서 시작해 집안일로, 서로의 태도로, 오래된 기억으로.
우리는 허벅지와 종아리를 탓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엉덩이에 있었다.
방치된 것들의 반격
이것은 비단 관계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조직에도 대둔근이 있다.
팀의 핵심을 맡은 사람이 있다. 그가 서서히 지쳐가고 있는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주변 팀원들이 무너진다. 번아웃이 번졌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사실 번진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핵심이 약해져 있었고, 주변이 그것을 감당하려다 함께 쓰러진 것이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오래 참아 온 감정, 해결하지 않은 채 덮어 둔 문제, 스스로에게도 인정하지 않은 상처.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옆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더 엉뚱한 형태로, 더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진다.
방치는 소멸이 아니다. 방치는 전이다.
진짜 다친 곳을 먼저 보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몸이 다쳤을 때, 우리는 가장 많이 아픈 곳부터 돌본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문제는 감정이나 관계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한다.
표면에서 나타난 싸움을 수습하고, 잠깐 화해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진짜 다친 곳, 그 근원은 그대로다.
대둔근이 아물지 않으면, 다음 넘어짐에서 종아리가 다친다. 그것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이렇게 묻는 연습을 한다.
'지금 화가 난 이유가 정말 이것 때문인가? 아니면 이것은 신호인가?'
이미 방치된 어딘가가 지금 이 사소한 자극에 반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싸움이 번질 때, 번진 방향을 쫓지 마라.
처음 다친 곳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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